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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들어선 골목길, 마중나온 노스탤지어

[리빙 앤 조이] 우연히 들어선 골목길, 마중나온 노스탤지어
■ 전국의 구석구석 골목길을 찾아서 /서은영기자 supia927@sed.co.kr

『 이 외딴 골목길

빗방울도 처마에 부딪쳐

자주 발 딛지 못하는 곳

길이라기보다는 틈


낡은 장롱 같은 집들의 틈

그 틈, 더 좁아지지 않도록

시멘트로 다져놓았다.

길인듯 아닌듯

숫기 없는 사람은 그 앞에서 발길을 돌릴 것이다

인기척 없는 집들의 인적 없는

이 외딴 골목길

스티로폼 상자와 고무 양동이 안에

나팔꽃 봉숭아가 피고 지던 흙이 굳어 있다

불 안 드는 빈 방처럼

이 어린애 같아 보이는 길

정작은 나이배기일 것 같은 길

시멘트가 빈틈 없이 깔려 있는

그러나 이 야성적인 길

-아주 외딴 골목길(황인숙)

“골목은 마음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오래된 이야기부터 바로 조금 전 벌어진 이야기까지 모든 걸 들려줍니다.”

9월초 ‘나는 골목에 탐닉한다’(갤리온)라는 책을 낸 권영성(46) 씨는 사진작가도, 건축학자도 아닌 그저 골목을 사랑하는 평범한 사업가다. 그런 그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골목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골목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모은 자료를 블로그에 공개하고 또 책으로 엮었다.

땅따먹기, 술래잡기, 구슬치기, 고무줄 놀이 등에 신이 난 아이들과 어린 손자를 안고 나무의자에 앉아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할머니, 대문 앞에 모여 앉아 저녁 반찬거리를 다듬으며 수다를 떠는 아주머니들, 학교 끝나고 두서넛씩 떼를 지어 장난치며 걸어오는 개구쟁이 남학생들, 혼자서 새침하게 걷는 단정한 교복의 단발머리 여학생, 장사를 마치고 좁은 골목을 능숙하게 리어카를 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행상 아저씨, 화려하진 않지만 마음을 포근하게 해주는 창틀 위 화초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만들어 놓은 정겨움. 골목 하면 권 씨가 떠올리는 따뜻한 풍경들이다.

권 씨는 “골목은 살아있는 삶이 담긴 종합예술품”이라며 “골목에 가면 그냥 마음이 편안해져 옛 모습을 간직한 골목들을 찾아다니게 됐다”고 했다. 그는 “때로는 길의 흐름을 느끼고 가파른 계단의 리듬을 타며 걷는 골목길은 읽을거리가 많은 책과 같다”고 말한다. 그는 걸어서 목동 집까지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영등포 사무실에서 버스를 타거나 대로변을 따라 귀가하는 대신 삐뚤빼뚤 골목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온다. 더 오래 걸릴지언정 이 시간은 그에게 가장 편안한 휴식 시간이다.

주로 골목 안 풍경을 테마로 작품 활동을 해온 사진작가 김기찬 씨는 자신은 한번도 고향인 서울을 떠나본 적이 없는데 고향은 점점 더 자신으로부터 떠나고 있다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골목길을 누비며 셔터를 눌렀다고 했다. 그는 ‘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샘터)이라는 제목의 사진집 서문에서 “골목은 무한히 넓고 깊은 세계다. 골목의 세계는 결코 변방의 세계가 아니다. 골목 안에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다 들어가 있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있고 가족이 있다. 슬픔과 기쁨이 상존한다. 골목 안에서 사람들은 꽃을 가꾸고 짐승을 키우기도 한다. 이런 작지만 애잔한 풍경들은 들여다보고자 하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다”라고 썼다.

하루 아침에 있던 건물이 사라지고 고층빌딩이 들어서는 도시개발의 시대에 문득 전국 대도시에서 골목 열풍이 불고 있다. 열풍의 근원에는 옛날을 기억하려는 아련한 향수, 도시의 옛 모습을 보존하려는 애착, 도시에 중첩된 역사의 흔적을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이 깔려 있다.

깊어가는 가을, 당신도 동네 뒷골목을 거닐며 아픈 역사의 순간, 가슴 시린 첫사랑 등 오래 전 책갈피 속에 끼워둔 마른 단풍잎 같은 추억을 꺼내보시라. 』

● 동네 명소에서 지자체 '브랜드'로 뜬다
서울종로 20곳 관광코스로
대구 중구 구도심 골목투어
2만여명 찾은 '히트 상품'
지역 예술활동 근거지 역할도

근자열 원자래(近者說 遠者來).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이 즐거워해야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는 공자님 말씀이다.

누구나 그렇듯 가까운 곳의 가치는 쉽게 깨닫지 못한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마을과 골목길, 오래된 집들도 우리 곁에 있을 땐 그저 퀴퀴한 일상일 뿐이다. 그러나 한번 사라진 풍경은 다시 살려낼 수 없게 되고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비로소 소중함이 느껴진다.

전국적으로 골목길에 빠져드는 도시인들이 늘고 있다. 가까운, 소중한 곳을 즐기려는 도시인들 덕에 도시의 좁은 골목길에는 외지인들의 발길까지 이어지고 있다.

■ 도시에 부는 골목길 열풍

피맛길(피맛골)은 조선시대 종로를 지나가는 고관대작, 양반들의 말을 피하기(避馬) 위해 백성들이 걸어다녔던 뒷골목길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진압을 피해 종로통을 뛰어다니던 학생들이 몸을 피할 수 있었던 좁은 골목길이기도 했고 인근 직장인들이 퇴근 후 ‘고삼(고등어와 삼치)’ 한 접시에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키며 스트레스를 풀던 곳이기도 했다. 종로 1가에서 6가까지 대로변 건물 뒤편 동서로 늘어진 이 골목길에는 600여년 간 이 길을 지나다녔던 사람들의 삶과 추억,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다.

하지만 도심 재개발에 밀려 피맛길의 터줏대감이었던 국밥집과 주점, 생선집과 파전집은 자취를 감췄고 인적도 드물어졌다. 새 것에 눈 먼 도시인들의 눈에는 낡은 피맛길은 지워야 할 과거일 뿐이었다. 무분별한 도심 개발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자 서울시는 피맛길을 원래 모습대로 보존ㆍ복원하기로 했다고 최근 밝혔다. 늦은 감은 있지만 그래도 다행스럽다는 평가다. 서울시는 피맛길을 시작으로 '순라길', '돈화문로', '태화관길' 등도 차근차근 정비해 도심속 문화공간으로 살릴 계획이다.

서울 종로구는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가진 동네 골목길 관광을 활성화하기 위해 가회동, 부암동 등을 중심으로 시범 운영하던 골목길 관광 코스를 20개로 확대하고 ‘골목길 20코스’로 브랜드화하기로 했다.

골목길 코스는 600년 도시의 문화, 역사와 생활상을 볼 수 있는 문화적 보고라 할만하다. 경교장과 홍난파 가옥이 있는 교남동은 역사ㆍ문화 기행코스, 한옥이 밀집한 가회동은 한옥체험 코스, 석파정과 도롱뇽으로 유명한 부암동은 생태ㆍ문화 탐방코스 등 다양한 테마로 개발, 내년부터 전면 운영할 방침이다.

서울뿐만이 아니다. 최근 대구광역시 중구청 문화관광과 직원 오성희 씨에게는 “대구 구도심 골목 투어에 참여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문의 전화가 쇄도한다. 2003년부터 시작된 이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2만여명이 참가했다. 골목투어는 모두 4개 코스로 코스마다 달구벌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든 역사의 현장, 명소 등이 포함됐다. 고교생 800여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도심으로 진출한 3ㆍ1운동길, 국채보상운동 창시자인 서상돈 고택, 동학 창시자 최제우가 처형된 관덕정, 삼성그룹의 모체인 삼성상회 옛터 등을 만날 수 있다.

오 씨는 “도시문화탐방 골목투어는 대구시의 100년 역사를 거창한 문화재나 명소를 통해 얘기하는 대신 모퉁이 돌멩이 하나, 골목을 메우는 붉은 벽돌 하나로 이야기하자는 것”이라며 “골목 해설사와 함께 100년 전 대구에 온 선교사들이 살았던 선교사 주택부터 종로를 비껴가는 진골목까지 구석구석을 걷다 보면 문화와 역사의 속살을 경험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걷기 열풍, 계속되는 개발에 지친 도시인들의 향수를 겨냥한 관광 상품들이 각광받으면서 골목길 투어 프로그램은 또다른 지자체로 확산되고 있다. 이종수 중앙대학교 행정대학원 연구교수는 “도시는 뒷골목이 있어 아름답다는 말처럼 고도(古都)를 문화체험 프로그램으로 개발하는 것은 문화적, 경제적인 관점에서 중요하다”고 밝혔다.

■ 골목길에 퍼지는 예술의 향기

구도심과 신도심으로 이원화돼 있는 유럽의 유명 도시들을 여행하다 보면 구도심 골목을 도는 관광 투어가 활성화돼 있다. 신도심이 주로 도시 거주자들의 일상이라면 구도심은 ‘여행객들의 세상’이 된다. 유럽의 고도에서 좁디 좁은 골목길을 걸으며 심미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골목길의 정서도 관광상품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도시의 역사와 문화 예술을 온몸으로 느낄수 있는 구도심이 관광객들에겐 훨씬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중국 정부에서 뒷골목(후퉁)과 전통 가옥을 없애고 도시 미관 정비 작업에 나서려고 했을 때 베이징의 후퉁을 사랑하는 전세계 골목 마니아들이 반대의 목소리를 보냈던 일, 반대로 일본 도쿄에서 뒷골목을 재정비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작업에 나섰을 때 관광객들이 박수를 보냈던 것, 그리고 서울의 피맛길이나 인사동길, 북촌 한옥마을을 찾는 외국인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도 다 같은 이유다.

지역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마을과 공동체를 예술활동의 기반으로 삼는 ‘지역주의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골목이 예술의 주제로, 하나의 화폭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낡고 허름하다는 인상이 강했던 가파른 언덕 위 마을의 골목길들이 ‘벽화마을’로 이름을 알리면서 마을과 낡은 골목길의 가치를 재발견하게 됐다. 예술 갤러리가 문턱 높은 건물 대신 마을 골목으로 내려온 셈이다.

충북 청주의 우암산 기슭의 수암골도 비슷한 사례. 청주 민예총이 ‘수동 공공예술 프로젝트-골목길 광장을 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마을에는 아기자기한 벽화가 생겼고 외지인들에까지 입소문이 났다. 신흥종교인 태극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된 부산 태극도마을 역시 동서대 시각디자인학과 학생들이 골목길을 따라 벽화를 그리면서 최근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2009 광주 디자인비엔날레가 열렸던 광주광역시 양림동에는 행사 직전 마을 골목 구석구석을 표시한 마을 지도가 생겼다. 문화예술의 산실이었던 양림동은 시인ㆍ소설가ㆍ극작가ㆍ미술인ㆍ음악인 등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한 곳. 게다가 근대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민주인권운동가, 신학자, 여성운동가, 사회운동가 등이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 같은 역사ㆍ문화ㆍ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광주 디자인비엔날레팀이 양림동을 하나의 전시작으로 내놓고 마을의 이야기를 한 장의 문화지도에 담아내기로 한 것이다.

지도에는 양림동 일대 60여곳의 문화자원과 100년이 훌쩍 넘은 구불구불한 골목길, 담벼락, 가옥과 고목들이 담겼다.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축제기간이던 9월18일~11월4일에는 매일 마을주민들로 구성된 해설사들이 관람객들과 함께 지도를 펼쳐들고 `근대문화 골목탐방’에 나섰다.

골목길 자체도 예술의 주제가 된다. 서양화가 김형대 씨는 부산 수영구 망미동 망미시장 옆 골목을 그의 작업실이자 갤러리로 꾸몄다. 15일까지 열리는 전시의 주제는 ‘골목길 이야기’. 망미동 골목길과 수정동 산복도로 풍경이 화폭에 담겨 골목을 배경으로 전시되고 있다. 김 씨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화폭을 아낌 없이 보여주고 싶었다”고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서울 북아현동에 위치한 추계예술대 미술학부 학생들은 북아현동 뉴타운 개발 지역을 주제로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 골목길의 추억을 담은 사진과 영상물 등을 전시하는 ‘골목에서 ‘주름’ 잡기’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주름이란 집주름에서 나온 말로 한동네에서 살면서 동네 속사정을 꿰뚫는 사람을 의미한다. 프로젝트를 위해 학생들은 주민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동네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며 ‘집주름’이 됐다. 북아현동의 골목 곳곳을 주제로 촬영한 사진과 영상물, 퍼포먼스 등으로 이뤄진 이번 전시는 추계예술대와 주변 골목들에서 6~10일까지 이어진다.

■ 골목길, 아는 만큼 보인다

사람들은 왜 지금 골목에 열광할까. 늘 곁에 있던 골목이 도시 개발로 이제 더 이상 일상이 될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일까. 혹은 마치 기억상실증에 걸린듯 잃어버렸던 어린 시절의 옛 추억을 되살려 또 다른 삶의 위안을 얻기 위해서일까.

출판사 갤리온의 배영진 편집팀장은 “최근의 도보여행 열풍과 낡은 것에 대한 향수, 경기침체로 인한 국내 관광 활성화 등에 힘입어 비용이 적게 들고 가까운 데서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골목 투어가 인기를 끌게 됐다”고 분석했다. 종로구청 문화관광과의 골목투어 담당자 정연수 씨는 “최근 제주도에서 자연을 둘러보는 올레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듯 골목 투어 역시 걷기 열풍에 힘 입은 바 크다”며 “골목길은 숲길 등 자연을 둘러보는 도보 여행과 달리 도시의 역사와 문화, 과거부터 현재까지 골목 사람들의 삶을 함께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도시별로 진행하는 골목투어가 점차 활성화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좁은 골목을 포함한 지도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예전에야 골목은 반드시 큰 길로 통하고 골목길만 따라 가도 에둘러 갈지언정 목적지에는 반드시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골목이 점차 사라지고 막다른 골목이 늘어난 만큼 골목까지 표시된 지도를 확보하거나 구청 등에 의뢰해 코스를 확인하고 출발하는 것이 손쉽게 골목투어를 즐기는 방법이다.

골목길 코스를 소개하는 책자가 여러권 출간돼 있어 이를 참조하는 것도 좋겠다. 서울의 경우 ‘나는 골목에 탐닉한다’(권영성), ‘골목이 있는 서울 문화가 있는 서울’(이동미), ‘골목에서 서울 찾기’(전영미), ‘맛과 멋 풍경이 있는 숨은 골목 즐기기’(이경택) 등에 골목 탐방 코스와 배경지식이 상세하게 소개돼 있다. 대구시의 경우 대구거리문화연대가 펴낸 ‘신택리지’, 영남일보 골목답사 취재팀이 발간한 ‘골목을 걷다’ 등을 참조하면 생생한 배경지식을 참고하며 골목을 돌아볼 수 있다.

혼자 골목길을 둘러 보더라도 골목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골목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골목마니아 권영성 씨는 “가급적이면 이른 아침에 방문하고 가족들과 함께 가서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이 된 아들이 중학교 1학년일 때부터 함께 손을 잡고 골목을 다닌 권 씨는 “아이와 함께 골목을 돌 때는 동네의 역사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는데 아이와 얘기하다 보면 나 자신도 전혀 새로운 것에 눈뜰 때가 많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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